[데스크시각] 코로나 시대 봉제조합의 유쾌한 반전 /김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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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코로나 시대 봉제조합의 유쾌한 반전 /김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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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기억이다. 고교 시절 등·하교를 하던 길목에 공장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언제나 재봉틀(이하 ‘미싱’으로 표현) 돌아가는 소리와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고교 3년 동안 단 하루도 미싱이 멈춘 적은 없었다. 심지어 오전 6시에도, 밤 11시에도 미싱 소리는 들렸다. 어느 순간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누가 저 미싱을 돌리는 것일까. 호기심은 풀지 못했다. 공장 창문이 높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 미싱 소리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민중가요 ‘사계’를 통해서다. 노랫말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그 가사는 막 대학에 입학한 학생의 시야를 한 뼘 아니 몇 뼘 더 넓혔다.

미싱은 봉제산업을 상징한다. 봉제산업은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봉제산업에는 ‘산업 역군’이니 ‘경제 성장 효자’ 같은 20세기식 수식어가 붙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늘이 더 짙었다. 미싱과 ‘시다’, 봉제공 같은 단어에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의 고난과 가난이 깊숙이 스며있다. 무엇보다 처절했던 노동 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 전태일 열사가 봉제공이었다.

21세기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고 무인 자동차가 도로를 질주한다. 미싱과 시다, 봉제공은 최첨단 산업에 묻혀 잊힌 듯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다. 바이러스는 인간 활동을 차단했고 경제는 추락했다. 인류가 자랑했던 최첨단 기술은 바이러스 앞에 무기력했다.

반전이 일어났다. 화석화된 존재로 여겨졌던 봉제산업이 되살아났다. 그것도 부산에서. 세상에 이런 드라마가 어디 있겠는가. 대표적인 노동집약산업이었던 봉제산업이 최첨단 시대에, 그것도 코로나가 창궐한 시대에 부활했다.

부산의 봉제산업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오래된 격언의 힘을 보여줬다. 부산은 신발도시 이미지가 강하지만 봉제산업도 만만찮은 역량을 보유했다. 금정구 서·금사지역과 부산진시장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왔다. 하지만 최첨단 산업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흩어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2018년 부산경남봉제산업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이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

2020년 코로나19가 엄습했다. 봉제산업도 피할 수 없었다. 위기를 맞았다. 여기서 발상의 전환을 했다. 해결책으로 찾아낸 것이 방호복이었다. 당시 정부는 수입 물량이 끊기자 국내로 시선을 돌렸다. 봉제조합은 발 빠르게 대처했다. 부산시 지원을 받아 셀프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정부는 일개 봉제조합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실적을 요구했다. 역량은 충분했지만 실적이 모자랐다. 그러자 시가 보증으로 측면 지원했다.

결국 봉제조합은 질병관리청에 방호복을 납품하는 회사 7곳 중 하나로 선정됐다. 봉제조합은 지역 봉제업체에 일감을 나눠줬다. 일손이 모자란 회사는 인접한 회사와 힘을 합쳐 부산의 봉제산업은 ‘사계’의 가사처럼 ‘미싱은 잘 돌아갔다’. 지난해 90만 벌을 공급했고 113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봉제조합 자산은 5700만 원에서 33억 원으로 불어났고 조합사에 출자금의 500%를 배당했다. 물론 각 회사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코로나 시대를 견뎌냈다.

봉제조합은 서동에 3층짜리 조합회관을 구입했다. 그 건물을 기반으로 중소벤처기업부의 ‘소공인 공동기반시설 구축사업’에 선정됐다. 29억 원의 첨단장비를 구축해 봉제산업을 고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지난달에는 ‘중소기업협동조합 상생발전 포럼’에서 우수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인류는 코로나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혼란에 빠진 사람이 적지 않지만 봉제조합은 없던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코로나 시대에 봉제조합의 유쾌한 반전이다. 혹시 길을 가다 어디선가 미싱 소리가 들린다면 잠시라도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자. 예전과 다른 소리가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김희국 경제과학부장 kuki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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